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형주 공방전 (문단 편집) ===== 칠군의 규모 ===== 자치통감을 번역한 권중달 교수는 중국의 고대병제를 적용해 101,500명 정도의 대병으로 추측했으나 이는 좀 높게 잡은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한편 [[화양국지]]에 따르면 7군의 규모가 30,000명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대로라면 거의 전군이 사로잡힌것이 된다. [[중국어 위키백과]] 번성지전(樊城之戰) 문서에선 1군의 규모를 12,500명으로 보는데 이는 조조가 직접 펴낸 [[손자병법]]의 주석 손자략해(孫子略解) 4권에서 조조 스스로 말하길 《사마법(司馬法)》에 이르길 12,500명을 군이라 할 수 있다(曹操曰:《司馬法》曰:「萬二千五百人為軍。」)이라고 적었기 때문에 나온 주장이다. 이 주장대로면 7군은 87,500명이다. 다만 이 설은 설득력이 낮다. 조조가 216년에 하후돈을 26군의 도독으로 임명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1군 12500명 설에 의하면 32만 5000명이 된다. 문제는 26군이 회남전선에 있었다는 것으로 당시 조조군에겐 이럴만한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1군 12500명 설은 신빙성이 낮으며 조조가 손자의 주석에서 언급한 것은 춘추시대 이전의 1군의 규모에 대한 언급으로 봐야할 것이다. 조조군의 편제를 명확하게 알 수 없기에 추측하는 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데, 『삼국지』 「오주전」에 우금의 보병과 기병 3만을 포로로 잡아 강릉으로 압송했다고 나오기 때문에 3만명 이상인 것은 확실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